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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ACT 예술 인문학 제 7강 FLUXUS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l 플럭서스운동 플럭서스(fluxus)란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는데 1960년대 초에서 1970년대에 걸쳐서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이다, 플럭서스라는 용어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마키우나스가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열린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l 플럭서스 선언문( Manifesto)

플럭서스 마니페스토에서 조지 마키우나스는 Flux의 개념을 인용하여 그들의 전위예술적 성격을 드러내는 말로 플럭서스Fluxus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플럭서스는 플럭스란 개념을 따라 예술의 장르간의 경계를 허무는 운동이었다.


“Purge the world of Americanism”


이는 기존의 부르주아적인 예술에 대한 반예술적인 성격을 반영하였으며 기존의 예술체계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이 다다이즘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플럭서스는 안티예술 혹은 네오다다이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지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를 네오다다이즘으로 인식하였지만 원조다다이스트에게서 neo는 의미없는 말이며 ism은 구식이다라는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전후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순된 표상이 되다


"부르주아 세계의 구역질나고, '지식인 척' 하는, 전문가적이고 상업적인 문화를 정화하라…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이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가도록 그 심장부에 불을 당겨라."

'플럭서스 선언문'ㆍ1963



플럭스서는 미래파나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이 하나의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화가 집단이라기 보다는 예술시장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개개인과 아웃사이더들이 모인 지극히 자유로운 집단이다


l 플럭서스의 예술가 대부분은 뉴욕의 소호 지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조지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하였고 딕 하킨즈는 유명한 썸씽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창설하여 1964년부터 1974년 까지 중요한 플럭서스의 중요한 초기 공연들을 기록한다. )



딕 하킨즈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출발한 플럭서스 운동은 이후 독일의 주요 도시뿐 아니라 뉴욕, 파리, 런던, 스톡홀롬, 프라하, 일본 등 전세계로 빠르게 파급되어 전세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이는 플럭서스 작가들이 여행과 서신 교환 등으로 교류를 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엽서 형태의 콜라주나 소규모 작품을 우편을 통해 교류하는 우편 미술(페일아트)을 통해 교류의 폭을 넓혔다. 레이 존슨 같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우편미술을 시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l 플럭서스 미술가들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은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며 많은 미술 형태가 동시에 그리고 불협화음처럼 전개되는 플럭서스 이벤트는 동시대에 등장한 액션이나 후에 나온 헤프닝과 비슷한 경우도 있겠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백남준과 샬롯무어맨


요셉보이스


플럭서스를 이끌어 나가는 많은 작가들은 플럭서스에 어떤 하나의 목적이나 방법이 없으며 이제까지의 예술과 몇몇 낡은 기존의 범주들이 더 이상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서로 협력했던 것을 플럭서스라 할 수 있다


l 1962년 fluxus festival 다큐영상





l Charlotte Moorman at New York Avant-garde Festival in 1964



l piano piece by maciunas excerpt



l 요셉보이스(1970)



l 2019 fluxus festival


l 플럭서스의 초기 이벤트들은 매우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극적, 허구적 요소가 삭제되어가면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시공간을 강조하고 매우 단순하고 개인적인 행위로 전환되었다, 이들은 예술과 현실사이의 간격을 없애고자 하였으며 연극,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으로 뚜렷이 구분된 예술 매체간의 인습적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이한 매체를 결합시킨 인터미디어 즉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시를 융합한 통합 발전시킨 것이다.



l 예술작품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포스터 모더니즘보다도 특히 시간성이 강조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변화하고 소멸하는 불확정성의 미학 또는 소멸의 미학이 그 특징이다.


l 플럭서스 의 소멸의 미학이 예술 오브제의 생산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작품의 아이디어나 공연 과정을 기록한 영상, 문서 등의 물적 자료는 작품이 증거물은 될 지언정 과거 예술 작품과 같은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음도 사실이다. 플럭서스 미술작품은 기상천외하며 부조리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그 밑에 깔린 태도는 후대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개념미술과 퍼포먼스 아트의 등장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l 플럭서스는 처음 미술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콘서트, 이벤트, 출판, 선언문 등 장르를 넘어선 탈장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플럭서스 예술가로는 마키우나스 존케이지, 요셉보이스, 샬롯무어맨, 레이존슨, 백남준 등이 있다.




우리 평론가 허원작가님의 수업리뷰도 같이 공유합니다.


오늘은 내가 기다리던 김예경 교수님(Ieggi Kim)강연 날.

역시나 앞집 학부형 권영현 언니가 하시는 재단 ACT의 8월 행사.

누구나 쉽게 좋아하는 음악 공연과 음악 강연에 비해 인문학, 미술 강의는 개인 취향을 많이 타는 편이라 소규모로 진행됐다.


지난번 남산의 갤러리 uhm에서 있었던 그로테스크 미학을 주제로 한 강의가 너무 재미있었는데, 이번달 강연 주제는 플럭서스(Fluxus).


플럭서스에 대해 내가 원래 알던 거라고는 ’백남준?‘ 하나. 이 활동의 배경이 뉴욕인지 베를린인지도 잘 몰랐는데, 오늘 알게 되었다. 답은 ’all of the ablove’. 백남준이 속해있던 그 사람들 맞고, 뉴욕과 베를린 모두 이어진 거 맞음.


플럭서스의 시작은 조지 마키나우스의 AG 갤러리. 마키나우스는 소호를 오늘날의 소호로 만든 장본인이자 플럭서스의 시작점. 뉴욕에서 플럭서스 활동이 뜻한 대로 잘 안 풀리고 갤러리가 파산한 뒤 마키나우스는 베를린으로 가고, 베를린에서의 페스티발에 유럽 예술가들이 합류하며 플럭서스는 제대로 전성기를 맞는다.


그렇다면 플럭서스는 무엇을 지향했는가?

일단 이전의 모든 ‘-주의’, 소위 ‘이즘’에서 벗어나고, 기존 질서를 모두 부정하는 예술가 집단이었다. 상업화, 대량생산, 자본주의 등 그 시대를 지배하는 모든 빅 브라더를 전복하려는 사고. 이런 운동이 자본주의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아참, 아이러니 역시 플럭서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축.


플럭서스는 그리하여 사조가 아니라 활동, 운동으로 설명된다. 라틴어 ’플럭서스‘에 가까운 영어 단어를 찾자면 아마 플로우(flow)일게다. 그러니, 플럭서스가 무슨 협회라서 회원증을 발급하고, 회원 명단을 작성한 그런 단체가 아니라, 뜻이 맞으면 함께 활동하고(=놀고, 예술가의 놀이란 곧 창작이니 말이다), 또 어느 순간 맞지 않는다 해서 대치하고 싸우는 게 아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형태의 활동. 이들의 활동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 정리된 생각은 이들인 ’담벼락을 만들지 않는‘ 집단이었구나.


플럭서스에 관한 강의는 한 번 더 남았기 때문에, 오늘은 그저 소개만으로 끝. 강연은 다음 시간에 계속.


그리고 더 좋은 시간은 강연 뒤의 대화.


모인 인원이 하우스 콘서트처럼 많지 않기 때문에, 오늘은 다 같이 둘러 앉아 차분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나는 얼굴들도 있으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권대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저는 앞집 사는 학부형이에요… 호호)‘, ’같이 오신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셨어요?‘ 뭐 이런. 오늘 모인 자리에서는 힘든 암에 걸려 수술, 투병 끝에 건강해 진 분들이 여럿 계셨다. 두런두런 비슷한 경험에 맞장구 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드는 생각이, 아… 예술은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는구나.


크게는 암 수술과 치료, 작게는 일상에서의 피로와 마음의 상처, 우리 안에 혼자 키워오던 불안, 이런 어려움 속에서 예술은 꾸준히 우리를 구원해 왔던 것이다. 사르코마라는 근육, 혈관 등에 생기는 희귀 종양에 걸렸던 무용가 선생님은 건강을 찾은 뒤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그 분 마음속의 가장 소중한 예술은 무용이었을텐데, 어느 순간 다른 장르가 병마와 싸운 그분을 구원했으리라.


암에 걸린 것을 알고, ‘내가 암으로 죽는게 아니라, 우울증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셨다는 다른 분은 항암치료를 하며 원래하던 일을 계속하셨다고 하고.


비가 와서 사냥을 나가지 못하는 날이면 동굴에 황소 그림을 그렸다던 먼 옛날부터 예술은 이렇게 크고 작은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 왔구나…하는 생각에 한 시간 남짓한 예술 강의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고, 감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권영현 대표가 운영하는 ACT는 소외 청소년들에게 예술과 가까워질 기회를 만드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이런 예술 강의가 소외된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 가질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강연 뒤의 대화에서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다. 예술이 크고 작은 시련에서 우리를 구원해 왔듯이, 지금 현재 답답한 현실에서 살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젊은 아이들이 ‘나중에 보니 그 순간이 내게 한 줄기 구원이었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 활동을 이어가야 하는 거다. 물론 현실적인 도움은 크고 작은 모금 행사를 통해 많은 이의 선의에 기대야 하겠지만, 예술에 의한 구원이, 그리고 예술을 통한 자기와의 화해, 이게 이 단체가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늘 느끼지만 허원님 글솜씨에 또한 번 반하고 만다.








FLEXUS에 관한 수업은 9월에 계속 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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